여행, 그리고 삼순이와 보리밥
여행, 그리고 삼순이와 보리밥
  • 보령뉴스
  • 승인 2023.12.29 12: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인.수필가 김병연

 

여행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설렌다. 왜 그럴까. 여행을 찌든 일상에서의 탈출, 스트레스의 해소, 재충전의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여행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도 있다. 한데 조금만 더 욕심을 부려 생각하면 여행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 깨달음을 주는지를 알게 된다.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거의 비슷한 일을 반복적으로 한다. 그러다 보니 생각이 고정된 틀 안에 갇혀 새장 속 새의 신세로 전락한다. 오랫동안 새장 속에 갇힌 새는 자신이 과거 창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녔던 기억을 잊는다. 새장 속에 갇힌 새를 갑자기 풀어 놓은들 이미 나는 방법을 잊어버린 새에게 창공은 의미가 없다. 여행은 우리에게 날갯짓을 잊지 않도록 하는 필수 교육과정(敎育課程)이며, 생각의 자유(自由)를 허락함으로 답답하고 고리타분한 사람이 되지 않게 만든다. 그러나 무조건 일상에서 탈출하는 여행만으로는 안 된다. 여행(旅行)이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日常)에서 벗어나 그저 스트레스(stress)나 풀고 돌아오는 정도로 그친다면 특별히 나아질 것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하며 그곳의 인문과 지리를 접한다. 주지하다시피 인문은 사람들의 정서, 생각, 행태, 인심, 예술혼 등 인간이 일구어 놓은 다양한 흔적 즉 문화이며 지리는 천혜의 자연 등 사람의 문화 이외의 모든 것이다.

여행을 통해 생각의 범위를 확장하고 싶으면 혼자나 둘이 떠나는 여행이 좋다. 여럿이 함께 떠나는 여행은 그저 놀다 오는 정도이지 유익한 깨달음을 주는 여행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찌든 일상에서 벗어나 유쾌하게 놀다 오는 여행도 나름의 가치가 있지만, 여행이 주는 교훈을 생각한다면 여행에 좀 더 깊이 있는 의미를 담아보는 것이 좋다.

지난날 우리의 가난을 잘 나타내는 삼순이란 말이 있다.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식순이, 공순이, 차순이로 불린 세 가지 직업(職業)을 합친 약칭이다.

1950년의 6·25 전쟁(戰爭)을 시작(始作)으로 50년대에는 식모살이하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식모살이하는 이들이 식순이다.

공순이는 1960년대 산업화시대의 여공들이다. 노조가 있었던 시기가 아니다. 그야말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인권 부재 속에서도 열심히 일해 가며 돈을 모은 알뜰한 사람들이었다.

차순이는 버스안내양이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 초까지 버스 안내는 차순이들이 도맡았다. 특히 시내버스의 경우 출퇴근 시간이면 승객들로 버스가 미어터졌다. 정류장마다 그 많은 승객들을 하차시키고 승차시키면서 곡예를 하기가 일쑤였다. 차순이마다 몸으로 승객을 밀어붙여 가까스로 태우고는 자신은 승강대에 매달린 채 ‘오라이!’ 소리와 함께 차체를 ‘탕! 탕!’ 손으로 두드리고는, 운행 중에 틈새를 만들어 들어가 차문을 닫는 개문발차(開門發車)가 다반사(茶飯事)였다. 대개 스무 살 미만이었던 차순이들은 가난으로 배울 때 못 배우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이 같은 삶의 현장에 뛰어들었다.

봄철인 3․4월경에 이르면 양식이 떨어져 보리 수확을 애타게 기다렸다. 이 시기를 보릿고개라고 불렀다. 보리가 익을 때까지 산과 들을 헤매며 나무껍질을 벗기거나 나물을 캐다 먹으며 연명했다.

보리가 본격 수확되면 보리밥으로 가을까지 견디었으며 쌀 수확 후에도 부족한 양식을 메우기 위해 매일 보리밥을 먹었다. 보리밥은 쌀에 보리쌀을 섞어 짓거나 보리쌀만으로 지은 밥을 말하지만, 거의가 꽁보리밥(보리쌀만으로 지은 밥)이었다. 1960년대에는 학생들의 도시락밥도 대부분 꽁보리밥이었다.

보리밥은 열무김치나 고추장에 비벼 먹거나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함께 먹으면 별미다. 그러나 보리밥을 먹으면 배가 쉽게 고프고 방귀가 잦았다.

꽁보리밥은 가난의 상징이었다. 보리쌀이 섞이지 않은 쌀밥은 설날이나 추석날 그리고 조상의 제삿날에나 먹을 수 있는 특식이었다.

●시인․수필가 김병연